@

137 Posts

대도시의 사랑법

🔖 PAGE
2022.03.26
재희 섹스야 이미 숱하게 한 사이였고 걔 몸이 내 몸 같고 내 몸이 걔 몸 같을 정도의 관계가 되어버려 뭐 하나 새로울 건 없었지만 둘 다 자존감이 낮고, 주기적으로 자살 충동을 느끼며, 학창 시절에 따돌림을 당해본 경험이 있고 꼴에 예술영화나 책 같은 것을 즐겨 보며 하루키와 홍상수, 불문학과 아우디 같은 구질구질한 것들을 혐오하는 공통점이 있는 게이라 서로를 꽤 특별하게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아 XX 이거야말로 “진짜 명문”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났을 때 비로소 나는 그와 내다볼 수 없을 만큼의 긴 미래를 상상해왔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내게 보낸 문자의 내용은 이러했다.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면 난 한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 (나는 때때로 성소수자가 정말 ‘소수’에 불과할 ..

정오의 희망곡

🔖 PAGE
2022.03.20
우리는 완고하게 연결돼 있다 우리는 서로 통한다 (…) 너와 단절되고 싶어 네가 그리워 -전선들 中 우리는 마침내 서로 다른 황혼이 되어 서로 다른 계절에 돌아왔다 (…) 성탄절에는 뜨거운 여름이 끝날 거야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모여들어 여전히 사랑을 했다 외롭고 달콤하고 또 긴 사랑을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中 넌 내가 바라보던 바다를 상상한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어느 날 아침에는 날 잊어줘. -인파이터 ─코끼리군의 엽서 中 아침에 깨어나면 모든 것이 멈출 것이다. 사소한 돌멩이들이 차갑게 침묵할 것이다. 사물들은 후퇴할 것이다. 나는 약속을 취소한다. 세면과 식사 준비와 출근을 취소한다. 창문이 얼어붙는다. 바깥과 안의 대기가 격렬하게 단단한 물방울을 만들고 있다. 서서히 모든 것이 정지한다. 이제..

칵테일, 러브, 좀비

🔖 PAGE
2022.03.12
자신의 영역에 멋대로 침입한 이들을 쫓아내고 싶다가도 발목을 붙잡고 가지 말라 외치고 싶었다. 장난은 짧았지만 외로움은 길었으니까. -35p 물의 공백을 메운 건 대부분이 생각들이었다. 시간이 많아지면 생각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지면 우울이 찾아들기 마련이다. -37p 눈을 감아도 계속 숲속의 누군가가 떠올라 괴로웠다. 괴롭다니, 그게 이렇게 간질거리고 초조한 기분이었나? 물은 짧은 시간 스쳐 지나간 장면을 계속해서 재생했다. 그 시선, 손짓, 미소, 낯설고 간지럽고 이상한 것들. -39p 애써 웅성이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지금의 상태는 이상했다. 뭔가를 망치게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40p 물은 어느 순간부터 하루 종일 숲을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숲이 없는 시간에도 숲이 ..

수학자의 아침

🔖 PAGE
2022.03.12
장미꽃이 투신했습니다 담벼락 아래 쪼그려 앉아 유리처럼 깨진 꽃잎 조각을 줍습니다. 모든 피부에는 무늬처럼 유서가 씌어 있다던 태어나면서부터 그렇다던 어느 농부의 말을 떠올립니다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을 경멸합니다 나는 장미의 편입니다 장마전선 반대를 외치던 빗방울의 이중국적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럴 수 없는 일이 모두 다 아는 일이 될 때까지 빗방울은 줄기차게 창문을 두드릴 뿐입니다 창문의 바깥쪽이 그들의 처지였음을 누가 모를 수 있습니까 빗방울의 절규를 밤새 듣고서 가시만 남아버린 장미나무 빗방울의 인해전술을 지지한 흔적입니다 나는 절규의 편입니다 유서 없는 피부를 경멸합니다 쪼그려 앉아 죽어가는 피부를 만집니다 손톱 밑에 가시처럼 박히는 이 통증을 선물로 알고 가져갑니다 선물이 배후입니다 -주동자 나..

그 애

🔖 PAGE
2022.03.03
우리는 개천쪽으로 문이 난 납작한 집들이 게딱지처럼 따닥따닥 붙어있는 동네에서 자랐다. 그 동네에선 누구나 그렇듯 그애와 나도 가난했다. 물론 다른 점도 있었다. 내 아버지는 번번히 월급이 밀리는 시원찮은 회사의 영업사원이었다. 그애의 아버지는 한쪽 안구에 개눈을 박아넣고 지하철에서 구걸을 했다. 내 어머니는 방 한가운데 산처럼 쌓아놓은 개구리인형에 눈을 밖았다. 그애의 어머니는 청계천 골목에서 커피도 팔고 박카스도 팔고 이따금 곱창집 뒷방에서 몸도 팔았다. 우리집은 네 가족이 방두 개짜리 전세금에 쩔쩔맸고, 그애는 화장실 옆에 천막을 치고 아궁이를 걸어 간이부엌을 만든 하코방에서 살았다. 나는 어린이날 탕수육을 못 먹고 짜장면만 먹는다고 울었고, 그애는 엄마가 외박하는 밤이면 아버지의 허리띠를 피해서 ..

불안의 서

🔖 PAGE
2021.11.28
나처럼 존재하는 사람, 삶을 살 줄 모르는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와 같은 유형의 극소수의 인간에게는 일반적인 삶의 양식을 포기하고 오직 관조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종교적인 삶이 무엇인지 모르며, 알 수도 없다. 인간은 이성으로 신을 믿는 것이 아니고 추상적인 믿음 자체가 불가능한데다가 추상적인 대상과 어떻게 교통을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른다. 우리가 영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삶을 미학적인 대상으로 관조하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성대한 축제의 분위기를 외면하고, 신들에게는 냉담을, 인간에게는 경멸을 던지며, 우리는 그 어떤 의도도 없이 오직 느낌에 탐닉한다. 의미는 없어도 좋다. 우리의 뇌신경이 원하는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