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d Case

뭐 어떻게 들릴 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자기관리가 그럭저럭 되어있는 편이고 잘 웃는데다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도 어렵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에게 호의나 호감 사는 것이 쉬운 편이다. 그리고 저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생긴 확신 때문에 당장 상대의 마음을 얻지 못해도 나중에 또는 다른 사람에게는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거절 당하는 상황에 크게 상심하지도 않고(속상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재도전이 가능하다는 거지.) 거절하는 일 또한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래서일까.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이 재밌는 모양이다. 스스로 난이도 올려서 하는 밸런스 패치 같은 거. 너무 쉬운 게임은 재미없다며 자기애에 어쩔 줄 몰라하는 중2병에 취한 케이팝 여돌 가사마냥 나를 곤란해 하거나 곤란하게 하는 사람에게 관심이 간다. 벽이 느껴지면 그 벽을 부수고 싶고 꽁꽁 언 얼음이 보이면 녹여 보고 싶다. 매즈 미켈슨 나에겐 더 이상 정신질환이 없다 짤은 대체 언제쯤 쓸 수 있는 걸까. 
 
아무튼 배우자 선택 이론 중 이마고짝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이 이론에서의 인간은 태어날 땐 완전한 존재이나 성장함에 따라 사회화 과정에서 억압되어 상실하게 된 부분을 보완해줄 사람에게 끌리게 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밀착형은 회피형, 융합형은 격리형, 수동형은 경쟁형, 보호자형은 고독형을 무의식적으로 선택하게 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느낌을 소유한 감각적인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되며 사색하고 감각적인 사람은 느낌을 갖고 행동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등 잃어버린 자신을 보완해 줄 사람을 찾는다는 것. 또한 부부치료에서 이마고짝은 주양육자를 닮은 사람(긍정적 특성과 부정적 특성 모두)을 배우자로 선택하게 된다고 말한다. 좀 징그러운 소리지만,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하고 연결감을 회복하려는 뇌의 무의식적 시도라고(아니 난 정말이지 뇌가 싫다.) 따라서 긍정적인 특성보단 부정적인 특성에 더 끌리게 되는데 이 이론의 주장에 의하면 주양육자의 부정적 특성이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주양육자의 부정적 특성을 가진 배우자(또는 연인)를 통해 좌절 받았던 그 시절(과거)로 돌아가 그때와는 달리 해결하지 못했던 욕구를 충족시키고 미해결 과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는 것.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어린시절 주양육자의 부정적 특성으로 인해 채우지 못한 욕구를 주양육자의 부정적 특성을 닮은 현 배우자를 통해 재현한 뒤 이를 해소하고 연결감을 회복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다. 
 

여담으로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가 해준의 미결 사건으로 남은 것은 해준의 인생의 미해결 과제가 된 것과 같다. 여러 이론들의 주장을 토대로 인간이 미해결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이것이 해결되지 않을 때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준다면, 이렇게 자신을 응답 받지 못하는 과거로 만들어 버리는 행위는 앞으로 상대의 삶에서 해소되지 않는 영향력으로 남아버리기 때문에 해준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기를 바랐던 서래에겐 상당히 유효한 방법이 되는 것.

 
이마고짝 이론의 타당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개인적으로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싶은 부분들이 좀 있다. 난 나와 결이 같은 사람을 단 한 번도 좋아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반대로 나보다 텐션이 낮고 모범적인 사람이 좋았다. 내가 아는 건 흥미 없어서 내가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알려줄 수 있고 날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 좋았고 감정이 좀 없이 무뚝뚝해도 그 높낮이가 안정적인 사람이 좋았다. 또 가만히 앉아서 아빠란 단어를 떠올렸을 때 느껴지는 부정적 이미지와 이제까지 만난 연인들에 대한 이미지가 제법 겹치기도 한다. 실제 아빠란 사람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내 기억에 의존하는 나의 기억 속 아빠 이미지와 과거의 사람들이 비슷하다는 아이러니가 아이러니다. 그러니까 재수없게도 제법 저 이론에 들어맞게 배우자감을 골라오고 있었다.
 
아마도, 아빤 날 사랑했을 것이다. 그것도 무척. 어린 마음에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내 기억 속 아빠는 항상 바빴고 일을 열심히 했다. 때문에 함께 놀았던 기억이 많이 없다. 같이 있었던 기억은 희미하지만 물질적으로는 풍족했다. 언제나 무언가 자주 사주고 싶어했다. 장난감이 가지고 싶으면 장난감이 생겼고 삐삐가 가지고 싶다고 말하면 사용하지도 못할 삐삐가 생겼으며 피아노가 가지고 싶으면 제대로 치지도 못할 피아노가 생기는 식이었다. 집 앞 5분 거리였던 학교 조차 꼬박 차로 데려다 주었다. 사람들과는 자주 대화하는 것과 달리 가족들과는 말수가 적었던 것 같고 일하는 뒷모습이 더 자주, 선명하게 떠오른다. 사랑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자꾸 행동을 보여주려 했던 게 기억난다. 가족 모두를 그렇게나 못 살게 괴롭혔으면서 나에겐 손찌검은 커녕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나를 조금이라도 쥐면 부서지기라도 할 것처럼 소중히 대했던 게 생각난다.
 
물론 전 연인들이나 내가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이 우리 아빠처럼 나쁜 사람이었단 건 결코 아니다. 그저 표현에 서투르단 핑계로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주고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라서 안절부절 못하거나 약간의 회피 또는 혼란형 애착 형태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을 뿐. 
 
그러나 이 공소 시효 없는 개인의 미제 사건은 더이상 억울함을 푸는 일도 아니요, 슬픔도 분노도 없다.
 
이제까지 내가 아빠를 미워했던 이유는 엄마였다. 아빠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엄마를 괴롭혔으니까. 그런데 정작 엄마는 아빠를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고통이 당신 딸을 키우는 것이 속상했던 거겠지. 

 

또 어느 날 술에 취한 동생은 누나 마음을 이해하지만, 자기는 아빠를 용서했다고 했다. 그런 아빠라도 있어준 덕분에 엄마도, 누나도 만날 수 있어서 완전히 미워할 수 없다고

 

그럼에도 난 꾸준히 아빠를 미워했다. 나에게는 그게 아빠다움이었으니까. 

 

하지만 점점 그 마음이 사라지고 있었다. 분노가 옅어질 때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라는 마음이 기웃거렸다. 그러나 아빠가 아빠답게 느껴지지 않았을 때부터 나는 아빠를 용서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용서하지 않고 버티는 미움. 이제껏 나를 키운 팔 할이 그 못난 마음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다 커버린 탓인지…. 아, 이런 것도 이유가 되는 걸까? 아니지. 참, 이유가 무슨 소용이야. 
 
최초의 최초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알 수 없어진다. 영향은 도대체 어디까지 뻗어있는 것일까. 

하지만 모르겠는 것은 어느새 알아서 해결되곤 했다. 그러므로 머릿속 한 귀퉁이에 작은 종이에 반듯한 글씨로 ‘이건 이런 거구나‘ 정도로 정리하고서 잊어버리기로 한다.

 

아낀다는 핑계로 자주 펼쳐보지는 않는 책 사이에 끼워둔 메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