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여기가 너무너무 좋아요. 혹시 여기를 잊게 되더라도 하느님이 생각나게 해 주시면 좋겠어요!”

자주 하던 말이 나와서 놀랐다. 사진 찍는 취미가 생긴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엄마, 엄마가 죽으면 어떡해?” 아이는 불안해서 이렇게 묻는다. 엄마는 아이를 안심시키고 싶어서 “네가 어른이 되고 엄마가 많이 늙으면 그때 죽는 거야”라고 대답한다. 

어릴 때 나는 “왜?”가 입에 붙은 애였다. 궁금한 건 전부 물어댔고 대부분 궁금했다(보통 그 대상은 엄마였다). 하지만 당시 느끼고 있는 것과 어른들의 설명은 언제나 차이가 컸다. 그래서 쉽게 믿기 어려웠다.

 

필립은 나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서 “안 돼!”라고 거절할 생각은 아예 해 보지도 않았음을 깨달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나탈리에게도 해 주었다. 나탈리도 정신적 과잉 활동 때문에 나에게 상담을 받고 있는 아가씨다.
“아니, 당연하잖아요! 나라도 그 수영복을 가지러 갔을 거예요! 저도 누군가로부터 뭘 해 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그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가 그렇지 않은가 따지지 않아요. 아예 그런 생각 자체가 안 든다니까요. 그 단계는 항상 뛰어넘고 ‘그래’라는 대답이 나오죠. 곧바로 시간을 어떻게 쪼개서 그 부탁을 처리할까 하는 생각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이 증상... 음... 증상이랄 것까진 없는 것 같지만, 저런 반사적인 행동을 도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답답했는데... 드디어 이유를 알게 돼서 마음이 편해졌다. 

 

그들은 세상의 불의, 사람들의 악의와 배신을 발견할 때마다 아연실색하고 분개한다. 그래도 자신이 옳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이상을 포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기준이 모호한 것들이 버겁다. 현실을 도저히 현실이라고 믿을 수 없을 때, 내가 희미해져서 불안하다.

 

이렇게 순수 가치 체계를 발전시키게 되는 주요한 이유는, 그들이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자신은 다른 별에서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이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찾기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사회적 규약은 그들의 이해를 벗어나거나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암묵적인 약속, 위선, 비겁한 꼼수, 보여 주기 위한 허례허식이 너무 많다! 왜 단순하고 솔직해질 수 없나?
그들의 완벽한 이상은 현실의 천장 아니면 바닥에 붙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들 자신은 천장과 바닥 사이에 있기 때문에 이토록 불완전하고 어긋난 현실을 소화하고 자기네들의 진실을 회복하려면 오만 가지 왜곡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 회사나 가정에서 그들은 온갖 불의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사태를 왜곡하면서까지 중재역을 맡는다. 물론 왜곡에 힘입어 중재를 한다는 것은 몹시 지치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신념을 버리라든가 다 놓아버리라는 말은 할 수 없다. 

안 그래도 작년부터 내가 가진 인간 혐오는 오히려 인간을 너무 사랑해서 생긴 것임을 깨달았으므로, 그냥 인정하기로 마음 먹었다는 이야길 하곤 했다.

 

이처럼 지나치게 긍정적인 시선이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였구나.

 

정신적 과잉 활동인은 가슴으로 생각을 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마음이 깃들지 않은 생각은 할 수가 없다. 매사에 감정을 실을 뿐 아니라 사물에 대해서까지 마음을 쓴다(사실, 이 친구들도 우리와 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정신적 과잉 활동 고유의 통합적이고 다각적이며 연상적인 사고에 힘입어 하나의 사물은 어떤 경험 혹은 추억과 연결된다.
“맞아요, 이 낡아 빠진 스웨터는 보풀이 너무 많이 일어나서 이제 입고 다닐 수 없어요. 하지만 이 스웨터를 버릴 순 없어요. U2 콘서트를 보러 간 날 입었던 옷이거든요. 쥘리앵과 첫 키스를 했을 때에도 난 이 옷을 입고 있었죠!” 우스꽝스러울지 모르지만 이 스웨터는 그 사람에게 이미 성스런 유물이 되어버렸다. 
보통 사람의 관점에서 이러한 사고방식은 부적절한 감상주의, 지나친 의미 부여로 보인다. 장소와 사물에 일일이 마음을 주는 태도는 유아적인 애니미즘과 동일시 되기도 한다. 애니미즘은 자연에도 영이 깃들어 있고 모든 것에는 고유한 영혼 혹은 정령이 있다는 믿음이다. 따라서 유아적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는, 모든 종교의 원시적 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한 믿음은 신성함에 대한 감각이 고조된 결과다. 정신적 과잉 활동인에게는 모든 것이 중요하고 가히 존중과 관심을 누릴만 하다.

이 부분에서 깜짝 놀랐는데... 솔직히 말하기 좀 민망하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사물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전제하에 생각하고 행동할 때가 많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양말 같은 거 널 때, 짝대로 안 맞추면 마음이 불편하지 않아? 엄연히(?) 짝이 있는 존재인데 그렇게 떨어트려 놓으면 쓸쓸해 보여.” 이 말을 들은 친구들 중, “나도 그래”라고 대답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뭐냐면서 놀리지도 않았다. 생각 해보니 그게 참 고맙다(놀림 받았으면 크게 상심했을 것이다). 

물론 어른이 된 지금은 이런 생각이 다소 유치하고 어쩌면 망상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질 것쯤은 안다. 그래서 속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한다. 양말이 외로워 보여서 짝을 맞추어 널고, 아무렇게나 놓인 물건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을까 싶어서 제자리에 정리하고, 친구가 준 선물 포장지조차 버리지 못하고 고이고이 모셔두면서, 짝 맞춰 넌 양말이나 정돈된 방 따위에서 이런 속마음이 읽힐 리 없으니 입만 열지 않으면 그저 정리 잘 하는 사람이나 되니 이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그러나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고 어림짐작하여 생각을 숨기며 행동하는 게 과연 나에게 이로운 것이었을까? 아무래도 아닐 것이다. 그래서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았다.

 

정신적 과잉 활동인의 인생을 꼬이게 하는 마지막 측면은 모든 정보를 정체성 단계에 놓으려는 강박 관념이다. 인생 최고의 콘서트에 입고 갔던 스웨터는 나름의 생애, 정체성, 영혼까지 부여받는다. 내 삶에 들어온 것은 나 자신의 일부가 된다. 그런 물건이나 사람을 어떻게 버리겠는가? 정신 활동이 유별나게 활발한 사람이 우선순위를 정하고 정리 정돈을 하는데 젬병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보를 환경 단계에 놓아 보자. 인간관계, 우정, 연애에서도 우선순위를 정할 줄 알아야 한다. 상대의 가치관이 나의 가치관과 정반대인데 왜 계속 그를 만나려 하는가? 서로 마찰을 일으키며 시간만 낭비할 게 빤히 보이지 않는가? 보통 사람들은 대화의 내용을 환경과 행동 단계에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에게는 논리적 연쇄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는 편이 일관성 있는 가치관을 정립하고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반대로 정신적 과잉 활동인은 자꾸 상위 단계에 만 머물려는 경향이 있어서 구체적이고 실생활적인 하위 단계를 망각하기 쉽다. 그들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까닭에 행동 대신 꿈에 만족한다(*실수를 한다면 난 바보 멍청이야!). 신경-논리적 단계는 실패를 상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실수는 귀중한 배움의 기회다. 

정리 정돈은 공감되지 않지만, 우선 순위를 정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어느정도 맞다. 얼마 전까지 열어뒀던 페잉에 “OO랑 OO 중 뭐가 더 좋아요?” 라든가 “지금까지 ~했던 ~중 가장 좋았던 걸 추천해주세요.” 같은 질문이 들어오면 한참 고민하다 결국 무엇도 고르지 못하고 “제가 무언가를 뭔가 선택하는 걸 잘 못해요.” 혹은 “오늘은 이게 좋아요. 하지만 내일은 바뀔 수도 있어요” 식으로 적당히 답변하곤 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무언가를 선택하면 다른 한쪽이 버려지는 것 같아서 그렇다. 나에게 선택은 정체성과 멀면 멀수록 하기 쉽고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어려워진다.

 

먼저 뇌의 리듬에 대해 얘기해 보자. 여러분의 뇌는 다소 바쁘다 싶을 정도로 줄기차게 돌아가는 편이 이롭다. 여러분도 한두 번 느낀 게 아니겠지만 여러분에게는 남들과 비교할 수 없는 에너지가 있다. 여러분은 하루 동안 남들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해 놓고 그것도 모자라서 한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좌절감을 느낀다. 여러분에게 보통 사람들의 일상은 보기만 해도 답답하다. 느리기는 엄청 느리면서 알맹이는 하나도 없어 보이니까. 물론 여러분은 종종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한다는 둥, 적정선을 지키지 않는다는 둥 비난을 듣는다. 그러한 비난에 더는 민감하게 굴지 마라. 그렇다. 여러분은 지나치게 역동적이라는 뜻에서 일종의 과잉행동장애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자, 사람은 자기에게 맞는 리듬으로 살아야 하는 법이니 남들이 하는 소리에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물론 남들에게 여러분의 리듬을 따라오라고 요구해서도 안 된다.
정신적 과잉 활동인은 이따금 번아웃 상태에 빠지곤 한다. 이 '가벼운 과로'는 말이 쉽지, 적정선을 알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원래 복잡한 회로는 몇 군데만 비틀어도 과일로 이어진다. 정신적 과잉 활동인은 낙타와 비슷하다. 100킬로그램 집을 실어야 힘차게 걸음을 옮기며 최상의 효율성을 보여 주니까. 하지만 그 집에 킬로그램만 더 보태도 낙타는 어느 순간 주저앉아 버린다. 그러니 그 1킬로그램을 조심해야 한다. 예상치 못했던 변수들이 들어설 자리를 남겨 둬라. 변수가 나타나지 않으면 잠시 긴장을 풀고 명상에 잠기는 시간으로 활용하면 된다. 그렇게 잠깐 숨을 돌리면 여러분에게도 좋은 일이다. 여러분은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끼려면 일상을 다소 숨 가쁘게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계속해서 도전하고 싶은 일을 구상하고, 동시에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추진해 보자.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산만하게 사느냐고 하겠지만 여러분은 그래야 삶의 균형이 잡힌다.

이것도 그렇다. 텅텅 빈 스케줄보다는 촘촘하게 짜여진 스케줄을 완수할 때 더 큰 활력을 느낀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하는 게 시간이 더 잘 가요”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잠깐 일 없는 거야, 잠시 한숨 돌린다 생각하며 농땡이 부릴 수 있지만, 하루종일 일이 없으면 그게 더 피곤했다. 그래서 에너지가 닿는대로 일을 찾아 하고는 했는데 그걸 보던 동생이 답답하다는 듯 도대체 왜 그렇게 사서 고생하냐면서 싫어했지만, 진짜 오해다. 뭐라도 하는 쪽이 가만히 있는 것보다 즐거워서 하는 거다.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회사 동료 중에 이런 일로 핀잔 주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네가 이러니까(안 해도 되는 일까지 하고 있으니까)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네” 같은 말을 덧붙이면서, 그럼 잠깐 미안해진다. 일하지 말 걸 그랬나? 하며 눈치를 본다. 하지만 3초 정도만 그러고 만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일에 미안해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매우 해롭다는 것을 경험적 지혜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핀잔주며 일어나려는 사람들에게는 가만히 계셔도 돼요. 제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 하고는 또 할 일 하러 간다.

 

 

 

 

 

더 공감된 부분도 많았으나 이 책만큼은 발췌하면 발췌할수록 적나라해지고 옮겨 적기가 민망해서 다 적진 못했다. 어디라고 콕 찝어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반적으로 크게 공감하기도 했고 작가가 제시한 방법 중엔 이미 내가 실행으로 옮겨 습관이 된 행동이나 생각도 제법 많았다(살기 위해 그렇게 했나보다). 비슷한 사람들의 사례를 읽으면서, 혼자가 아니란 생각에 받게 되는 위안이 있었다. 

나는 나를 잘 아는 것인지 그렇지 못한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이는 흡사 자가당착으로 비추어지기 쉬운데, 순간의 기분에 대해선 곧잘 판단하지만 자기 욕구 또는 욕망에서 비롯된 습관이나 취향은 타인이 말해줘야 깨닫는 때가 많고 신념을 저버려야 하는 때가 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어져서 행동을 주저하는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날 사랑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스스로가 늘 의문스러웠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니 이러한 모순들이 약간이나마 이해가 돼서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을 불안해 한다. 메타인지가 떨어질수록 삶에 대한 확신이 줄어들고 자신감이 없어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은 뒤 마음이 많이 편해질 수 있었던 건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아서 일 것이다. 

읽다가 내 생각이 났다며 책을 선물해 준 친구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정말 정말 고마워요. 사랑해요.